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클라조메네에서 태어났다. 아테네에 처음으로 철학을 들여와 진실한 의미에서 있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 (,에온)뿐인 일원론(一元論) 내세우면서 많은 것의 존재와 운동변화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또, 느끼거나 경험할 있는 세계의 다양한 모습과 그 운동변화를 깨닫는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리에 어두울 수밖에 없고 진실을 가리지 못함이라고 해석한 엘레아학파에 의한 이오니아 자연철학을 위기에서 구하려고 하였다.

엠페도클레스가 네 가지 원소를 설명 했다면 아낙사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본질이 무수하게 있다는 무제한의 다원성을 주장했다. 그는 그것들을 ‘만물의 씨앗(Spermata)’이라 부르며, 사물의 생겨남과 사라져 없어짐에 대해 부정하였다.

spermata는 여러 가지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관계를 포함하고 있지만 질적으로 서로 다른 생겨나지도 않고 또한 없어지지도 않고 늘 있는 불생불멸의 미립자 물질로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고, 그것은 뒤섞여 한데 합함과 서로 나뉘어 떨어지는 것만 있을 뿐이라는 주장으로 씨앗은 ‘각각의 고유한 가능성들’이라 하였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현상들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능성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미리 그렇게 되도록 계획 되어 있고 반드시 계획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계획이 무엇인가로 ‘될 것’이 되는 것이 ‘씨앗’이다. 이러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일정한 조건하에 성립하는 보편적ㆍ필연적인 불변의 관계인 우주의 근본 이치와 법칙이다.
 
콩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씨앗이 팥이 되는 것이 아니며 생쥐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씨앗이 코끼리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날 때부터 각각 본디 지니고 있는 법칙을 가지고 앞으로 무엇인가로 실현될 있는 성질을 ‘씨앗’이라 했다.      
  
이 씨앗을 움직여 생성되고 변화하게 하는 힘의 동력원소를 누스(nūs, Nous, 마음ㆍ정신ㆍ이성)라고 불렀다. 이점이 아낙사고라스 이전의 철학자들과 분명하게 다른 생각이었다. 이를 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낙사고라스가 누스를 생각해 냈다는 것을 아주 높이 평가하면서 취해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 중에서 정신인 사람은 오직 아낙사고라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낙사고라스가 말한 누스의 의미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했다는 것과 태초에 씨앗은 혼돈(混沌) 상태로 존재했는데, 누스의 작용으로 회전운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확대되어 여러 가지로 갈라져 나오게 하는 운동의 본바탕을 누스로 파악한 것이다. 누스는 사물을 만들어낸 주체는 아니지만 그것에게 존재했던, 존재하고 있는, 존재하게 될 모든 사물이 질서를 가지게 하는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누스는 논리나 이치에 맞는 성질을 가지고 어떤 일이든 못하는 것이 없으며 비인격적인 것으로 사유하는 정신의 기초가 되는 근거와 보편적 진리이기 때문에 누스는 다른 것과 달리 그 자체에 특유한 것이며 그 속에는 어떠한 불순한 물질도 섞여 있지 않은 것으로,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사물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는 혼돈상태에 빠져있는 질서를 아름다움의 목적에 맞는 질서 있는 세계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미립자인 누스는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자(동력원소) 존재하지만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또 다른 것과도 한데 섞이지 않고 오직 스스로 있다. 그리고 누스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지배한다. 또 누스는 모든 것에게 처음으로 회전운동을 일으키도록 회전운동 자체를 지배한다.

회전운동은 작은 점에서 시작되지만, 점점 범위를 넓혀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무한대로 더 넓어나갈 있는 것이다. ‘무언가’가 감지하는 지성을 ‘누스’라 있으며 또한 초월적인 힘으로 이해해 있다. 회전운동을 일으키도록 회전운동 자체를 지배한다는 아낙사고라스의 생각과 흡사한 이론은 현대의 물리학에서도 설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