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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린더사전) 마거릿 생거
(한줄요약)
오늘날 세계 여성의 대부분이 피임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피임이 세계적으로 일반화되는 데는 ‘산아제한’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미국 여성 마거릿 생거의 기여가 누구보다 컸다.

마거릿 생거는 1916년 10월 산아제한 클리닉을 연 죄로 투옥된 이후 1966년 사망하기까지 50년 넘는 세월 동안 일관되게 산아제한 운동을 펼쳤다. 마거릿이 죽기 1년 전인 1965년 미국의 대법원은 ‘미국인이 피임을 실시할 헌법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그가 시작한 피임운동은 근대 여성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

1912년 뉴욕 로우어 이스트 사이드의 빈민 거주 지역에서 트럭 운전사 제이크 작스의 부인이던 26세의 젊은 유대인 이민 여성 새디 작스는 자궁 속에 날카로운 도구를 집어넣어 유산을 하려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2주일 뒤 병세가 호전되자 다시 임신하게 될 것을 우려한 새디는 의사에게 “믿을 만한 피임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하지만 의사는 “남편을 지붕 위에서 자게 하라”는 말만 했다.

당시 의사를 동행했던 간호사 마거릿 역시 믿을 만한 피임법을 알려주지 못한 채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3개월 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고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새디는 마거릿이 도착한 지 10분 뒤 숨졌다.

“피임법을 알려달라”고 애원하던 새디의 모습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피임을 하지 않은 끝에 열한 명의 아이를 낳느라 쇠약해져 50세에 사망한 마거릿의 어머니, 아니 당대 많은 여성의 얼굴이기도 했다.

이 시기 미국인의 사망 원인 중 1위는 결핵이었지만 14세에서 54세 사이의 여성은 출산 도중 목숨을 잃는 수가 결핵으로 죽는 수보다 많았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인한 빈곤과 질병, 죽음을 상징하는 새디의 죽음은 마거릿에게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이후 마거릿의 인생은 ‘여성이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통제하도록 해야만 한다’는 하나의 모토로 집약될 수 있다.

당시 미국에는 다양한 피임방법과 기구들이 알려져 있었지만 대단히 초보적인 수준으로 효율성이나 안전성에 대해서는 검증되지 않은 상태였다. 체계적으로 출산 조절 방법을 배우기 위해 마거릿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로 갔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1914년 ‘여성혁명’이라는 잡지를 발간했으며 유럽 체류 중에 수집했던 피임과 관련한 모든 지식이 동원된 ‘가족계획’이라는 팸플릿을 발간했다. 세부적인 사용 지시까지 곁들여진 처방, 도표, 지시사항이 담긴 이 팸플릿은 인쇄업자 20명이 인쇄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진다.

나아가 생거는 1916년 10월 16일 최초로 산아제한 클리닉을 열었다. 네덜란드에 있던 소규모 가족상담소를 제외하고는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산아제한 클리닉인 이 상담소의 개설은 오늘날 피임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당시 이 상담소의 광고 문안을 살펴보자. ‘어머니! 당신은 대가족을 거느릴 여유가 있습니까? 당신은 더 많은 아이들을 바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왜 임신하는 거지요? 아이들을 죽이지 말고, 생명을 앗아가지 말고, 미리 예방하세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혹은 재정적으로 돌봐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을 내보내지 말자’는 아이디어는 20세기 초반의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출산과 분리된 성적인 만족을 금기시하고 있었으며 이는 피임을 도덕적으로 금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산아제한 움직임이 상당히 확산된 1930년에 교황 피우스 11세가 발표한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산아제한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대변했던 ‘정숙한 결혼에 관하여’라는 문건은 산아제한에 대한 가톨릭의 반대가 얼마나 거세었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이 문건에서 교황은 “자손을 번식시키는 것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행위는 신과 자연의 법칙을 어긴 것으로 그러한 일을 행한 자는 심각하고 치명적인 죄로 오염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핵가족 지향의 경향을 도덕적인 타락의 징후로 간주하고 이를 ‘종족에 대한 범죄’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관념은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서도 강화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컴스톡법을 언급할 수 있다. 1873년 제정되어 1920년대까지 지속된 컴스톡법은 음란물이 공공우편을 통해서 전송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 법에 따르면 피임과 낙태에 대한 내용 역시 포르노그래피와 마찬가지로 음란물로 간주되고 있었다.

컴스톡법이 지배하던 시대에 ‘여성혁명’지나 ‘가족계획’이라는 팸플릿을 발간한 죄로 마거릿은 오랜 세월 유럽에 망명하기도 했고 1916년 10월 산아제한 클리닉을 열었을 때는 수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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